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흥왕 순수비 (문단 편집) ===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 [include(틀:북한의 유적지)]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황초령비.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황초령 순수비, 높이=200px, 너비=100%)] }}}|| || {{{#000000 {{{-2 황초령비가 있던 위치.}}}}}} || [[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 진흥리(眞興里)[* 광복 당시 주소]에 진흥왕이 설치한 비석.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던 현재의 [[북한]] [[함경남도]] 해안 지역을 정복하고 [[568년]]에 [[황초령]] 고개에 세운 순수비.[* 예나 지금이나 지리적 요충지임은 마찬가지라서 이 황초령은 [[6.25 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의 전장과도 굉장히 가깝다.] 현재는 [[북한]]에 있으며 [[북한의 국보]] 제110호이다. 진흥왕 때 [[신라]]가 [[함흥]] 평야와 [[개마고원]] 일대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함경남도]] 지역은 [[원산]]만 북쪽 지역으로, 나중에 [[삼국통일]]을 한 뒤에도 신라가 다시 차지하지는 못했다. 함흥은 수도 서라벌에서 직선거리로 480 km나 떨어졌다. [[https://www.google.co.kr/search?biw=1920&bih=949&ei=-Nn2WrHOIoe48QWQ4KzICQ&q=gyeongju%2Csouth+korea+to+hamhung%2C+north+korea+distance&oq=Gyeong&gs_l=psy-ab.1.0.35i39k1l2j0l8.1113933.1115524.0.1118470.6.6.0.0.0.0.139.606.0j5.5.0....0...1c.1j4.64.psy-ab..1.5.605....0.Qoz9BjBqSw8|#]] 고구려를 완전히 제압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 당시 교통기술로는 함경도를 장기적으로 지배하기가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진흥왕 사후 곧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조선 중기 [[선조(조선)|선조]] 대에 [[신립]]이 북병사로 있던 당시 탁본해 왔다고 조선 중기의 문신 차천로가 《오산설림》에 기록한 것으로 봐서 선조 시대까지는 황초령비가 온전히 전해진 것 같은데, 조선 후기에는 이미 세 조각으로 깨져서 이곳저곳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정조 14년(1790) [[홍양호]]가 황초령비의 근황이 궁금해서 함흥 통판으로 부임하는 유한돈에게 거기 가거든 황초령비가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몇 해 뒤 유한돈은 조정에서 이 비의 탁본을 자주 요구하자 그곳 백성들이 벼랑 아래로 밀어뜨렸다고 알려주었다. 이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순조 32년(1832),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한 추사 [[김정희]]는 마침 절친한 벗 권돈인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그에게 황초령비의 파편을 찾아볼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권돈인은 마침내 비석 일부를 찾아내 관아에 옮겨 보존했다. 김정희는 비석을 찾아낸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관아가 아니라 원래 있던 제자리에 있어야 신라 진흥왕의 강역이 거기까지 닿았음이 증명된다고 비석을 옮겨달라 부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20년이 지난 철종 3년(1852), 김정희가 [[북청부]]에서 두 번째 [[유배]]를 살고 있을 때 마침 후배 [[윤정현]](尹定鉉)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김정희는 또 황초령비의 원위치 복원을 부탁했다. 윤정현은 두 조각을 수습해 황초령 고개 바로 아래 중령진에 비각을 세우고, 이건기와 김정희가 써준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동네 이름도 진흥왕에서 딴 진흥리가 되었다. ||[[파일:황초령비 비각2.png|width=100%]]||[[파일:황초령비 비각.png|width=100%]]|| ||<-2> 황초령비 비각 (1911년경 촬영). 비석 중 오른쪽에 있는 것이 황초령비. || 1931년 나머지 한 조각을 다시 발견해 같이 합쳤고, 이렇게 다시 이어붙이고 깨지고를 반복해서 현재는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많다. 그런데 김정희의 의지와 달리 결국 비석은 다시 원래 자리에서 함흥으로 옮겨졌다. [[비석]] 실물은 지금은 [[함흥시]]에 있는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남한에는 모조품과 탁본들이 여러 박물관에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은 신라가 이렇게 북쪽까지 북진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봐서, 순수비 비석 자체가 후대의 위작이라거나 [[고려]]시대 [[윤관]]의 여진 정벌 때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좀 더 남쪽 어딘가에 있던 비석을 북쪽 황초령에 옮겼을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북쪽인 마운령에서 마운령 순수비가 발견되어 설득력을 잃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